단지 섬이라는 이유로 끝없이 반복된 수탈과 핍박에도 한자락 노랫가락에 한을 실어보내고 꿋꿋하게 삶을 이어왔다. 또 삼별초의 항쟁, 임진왜란 등 여러 차례의 전란을 통해 남자들이 떼죽음 당해 여자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던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어머니·아버지 혹은 내 식구가 세상을 등지는 날 두 눈에서는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비통한 곡 대신 더없이 흥겨운 육자배기를 곁들인 한바탕 놀이판으로 이별의 설움을 달랜다. 그러면서도 훈훈한 인심과 바다같은 포용력으로 모든 것을 가슴에 묻고 아무 일 없는 듯 세상과 소통하며 살고 있다. 전남 진도는 그런 고장이다. 갖은 핍박과 설움 속에서도 남종화, 진도아리랑 등 남도문화가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인지 모른다. 진도는 또한 적지않은 볼거리를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뱃길로 30여분 떨어져 있는 조도군도가 백미다. 진도 서남쪽 조도군도는 하늘에서 보면 마치 큰 호수에 새떼가 앉아있는 듯한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도군을 이루는 230개의 섬 가운데 절반이 넘는 154개가 몰려 있다. 이들은 가사오군도·상조군도·하조군도·관매군도 등의 이름으로 나뉘어 있는데, 해상 면적까지 더하면 충청북도보다 넓다. 이 많은 섬들이 제마다 개성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꼽힌다. 조도군도는 또 조선 후기 영국과도 인연이 깊다. 영국 해군 장교이자 여행가인 바실 홀이 라이러호를 이끌고 중국을 방문한 후 돌아가는 길에 1816년 이 군도에 닿은 것이다. 당시로선 드물게 세계 각지를 경험한 그가 조선을 떠난 후 썼던 '조선 해안 및 류큐제도 발견 항해기'(한국판 '10일 간의 조선항해기')에서 조도군도에 대해 '세상의 극치'라는 표현을 썼을 만큼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실 홀은 지나친 섬들에 선원의 이름을 따 각기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영국지도에 하조도는 앰허스트섬, 상조도는 몬트럴섬, 외병도는 샴록섬, 내병도는 지스틀섬이라고 적혀있다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조도군도를 모두 돌아보는 관광상품은 없다. 진도 남쪽 팽목항에서 하조도 어류포를 왕복하는 연락선과 진도 서남쪽 쉬미항에서 인근 가사오군도만 돌아오는 유람선이 운항할 뿐이다. 그나마 조도군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다. 상조도에서 가장 높은 해발 210m의 도리산 돈대봉이다. 돈대봉에 서면 상조도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펼쳐지는 '새떼'의 군무를 감상할 수 있다. 바실홀이 지상 최고의 아름다움을 감상한 곳도 바로 여기다. 지난 주말 쉬미항에서 조도군도로 가는 진도군 어업지도선의 신세를 지기로 했다. 아침 일찍 항구를 떠난 배는 방향을 서남쪽으로 틀었다. 뿌연 안개 너머로 병풍처럼 이어지는 섬은 마치 커다란 호수 한 가운데를 달리는 느낌을 전해준다. 약 30분 뒤 배는 조도군도의 중심인 상종도 섬등포에 닿았다. 과거 꽃게 파시가 열렸던 포구로 지금도 꽃게를 사고 파는 장이 열리기도 하는 곳이다. 군도 사이로 한류가 흐르고 있어 이곳에서도 꽃게가 잡힌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포구에서 버스로 갈아탄 뒤 섬 한가운데 자리한 돈대봉에 올랐다. 돈대란 높은 언덕에 옹벽을 쌓은 곳이나, 성벽을 쌓아 적의 침입등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던 곳을 말한다.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정상에 오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은 180도를 볼 수 있는 인간의 시야에도 모두 담을 수 없을 만큼 웅장했다. 사방을 돌아봐도 푸른 바다 위에 점점이 박혀있는 섬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게다가 옅게 깔린 해무(바다안개)와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을 전해줬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비경을 적지않게 봤지만 돈대봉에서의 풍경을 따라가기는 힘들 듯했다. '세상의 극치'라는 홀의 표현도 부족했다. 돌아오는 길에 진도군 어업지도선은 보너스로 여러 섬을 소개했다. 백야도·주지도·혈도·불도·광대도…. 먼저 백야도. 보름달이 비추는 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모습이 황홀하다고 한다. 이어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낸 '천년의 탑'을 품고 있는 불도, 득도 직전 속세에서 만난 여인을 잊지 못해 율법을 위반한 진도 지력산 동백사 주지스님과 속세의 여인이 바위로 변한 주지도와 혈도로 안내했다. 불도를 떠난 배가 잔잔한 파도를 헤치며 쉬미항으로 향하는 사이 멀리 한 마리 사자가 엎드린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형상을 한 섬이 나타났다. 사자섬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을 바꿔 광대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쉬미항 입구의 작은 섬을 스쳐갔다. 작두가 누워있는 듯해 작두섬으로 불리는데, '꽃과 나비 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조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보필했던 궁녀 여섯 명을 "어머니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형시킨 후 이 섬에 묻었는데, 이후 섬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진도군은 이 섬을 연인들을 위한 데이트 코스로 만들기 위해 개발에 한창이다. ▲가는 길=진도 임해면 팽목항에서 조도군도 면소재지가 자리한 하조도로 하루 5차례 연락선이 운행한다. 요금은 1인당 3000원이며, 자동차를 실으면 1만 4000원(운전자 포함)이다. 조도농협 운송계(061-542-5383~5385). 하조도에서 돈대봉까지는 버스(1인당 5000원·10인 이상) 또는 택시를 대절해도 된다. 조도여객(061-542-8910). ■그밖의 가볼 만한 곳 ▲운림산방 조선 말기 남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8~1893)이 말년에 머물던 집의 당호이다. 20세기 들어 오랜 세월 황폐했으나 1982년부터 복원작업이 이뤄져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소치의 사랑채와 화실, 소치와 후손들의 작품을 전시한 전시관 등이 있다. 운림산방 한켠에는 진도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용장산성 1270년 몽고와 화친을 맺으려는 고려 정부에 맞서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한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나 근거지로 삼았던 성이다. 주변으로 12.85㎞에 이르는 산성, 웅장한 석축으로 꾸며진 행궁터 등이 남아 있다. ▲세방낙조대 진도 서쪽 해안 세방리에 세워진 전망대이다. 다도해의 수많은 섬 사이로 넘어가는 일몰이 장관이다. 기상청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 전망대로 꼽은 적이 있을 만큼 대표적 낙조 감상 포인트이다. 글·사진 : 박상언 기자 출처 : [마이프라이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