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돼지독감(SI)으로 불리게 된 것은 유전자 족보 탓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8개의 유전자 조각으로 돼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초기에 신종 인플루엔자 환자에게서 나온 바이러스를 분석해보니 돼지·조류·사람의 유전자가 섞인 잡종이었고 기존 돼지 바이러스와 유전자형이 비슷했다. 그래서 WHO는 SI라는 이름을 붙였다.
▶ 당장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10여 개국은 미국과 캐나다산 돼지 수입을 중단했다. 이집트 정부는 25만 마리에 이르는 전국 모든 돼지에 대해 도살령을 내렸다. 우리 돼지들도 날벼락을 맞았다. 삼겹살집들은 손님이 줄고, 40만원 하던 110㎏짜리 돼지값이 며칠 새 10만원이나 떨어졌다. 양돈 농가들은 인플루엔자 앞에 붙은 '돼지'를 빼라며 질병관리본부 앞에서 시위까지 벌였다.
▶ 시간이 흐르면서 돼지가 이번 인플루엔자와 직접 연관이 없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더해갔다. 환자들이 돼지에게서 감염됐다는 증거가 없고, 닭들이 무더기 폐사했던 조류독감 때와 달리 이번엔 돼지가 인플루엔자로 죽어나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문제는 이 인플루엔자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염되고 있다는 점이다. '돼지독감'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단지 이 독감 바이러스가 1918년 처음 발견된 동물이 돼지였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근원이 돼지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 그러면서 각국과 기관들은 저마다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이번 인플루엔자를 다양한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가축 질병을 다루는 국제수역사무국(OIE)은 멕시코에서 발병해 미국으로 번졌다는 점을 들어 '북미인플루엔자'로 부르자고 주장했다. 돼지고기를 많이 수출하는 유럽연합(EU)의 집행위원회는 '신종 독감'으로, 돼지를 불결하게 여기는 이스라엘은 '멕시코인플루엔자'로 불렀다.
▶ 처음 'SI'라는 이름을 지었던 미국도 농무국이 나서서 'H1N1 바이러스'로 부르기로 했다. 양돈업계와 돼지 수출이 입을 피해를 우려한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돼지인플루엔자라는 이름을 고집해온 WHO도 결국 어제 '인플루엔자 A형(H1N1)'으로 공식 명칭을 바꿨다. 이에 따라 우리 언론도 '신종 플루' '인플루엔자 A형' 등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양돈 농가와 돼지고기 음식점들이 더이상 애꿎게 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김동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