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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민이라고 말로만 들었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철거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한강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의 한 아파트단지. 입주한 지 6년도 안 된 아파트 안의 환경은 쾌적해 보였다. 그러나 아파트 옥상에서부터 내려와 있는 긴 펼침천에서 이곳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삶의 터전 짓밟는 서울시를 규탄한다. 멀쩡한 새 아파트 철거가 웬말이냐’
아파트 주민 황영희(61)씨는 “새 아파트를 허물고 그 자리에 고층 빌딩을 짓겠다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며 “60평생 열심히 일해서 이제 겨우 내 집을 마련했는데, 쫓겨날 처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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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이촌동 한강변 1천여 세대 쫓겨날 판
황씨뿐 아니라 서부이촌동 일대 아파트에 사는 1천여 세대가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으로 아파트에서 쫓겨날 처지다. 서울시와 용산구는 코레일이 소유한 철도 정비창안에 620m 높이(150여층)의 빌딩을 짓는 것을 비롯해 용산 일대에 컨벤션 센터와 호텔 등을 갖춘 국제 상업지구로 개발한다는 구상이다. 총 사업비만 28조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오세훈 서울시장의 핵심 시책인 ‘한강르네상스’ 사업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 사업계획에 따라 한강변을 끼고 있는 서부이촌동 일대 12만4000㎡는 문화시설과 주거지, 공원부지로 재개발된다.
그러나 서부이촌동에는 입주 3년째인 동원 베네스트 아파트(120세대)를 비롯해 6년전 재건축 준공검사를 마친 성원아파트(340세대), 분양한 지 10년째인 대림아파트(660세대) 등 새 아파트들이 많아 주민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주민들은 “고층 빌딩으로 개발되면 분양가가 천정부지로 뛸 것이 뻔하기 때문에 다시 들어와 살려면 수억원의 추가부담금을 지급해야 한다”며 “서울시가 주민들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세훈 시장 직접 나서 ‘전도사’…무늬만 친환경·친문화
임기 하반기에 접어든 오세훈 시장은 요즘 부쩍 강연에 나서는 일이 많아졌다. 주제는 ‘서울을 디자인하라’다. 오 시장의 서울 청사진은 “서울을 맑고 매력 있는 세계도시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디자인서울’ 정책으로 구체화했다.
오 시장은 2년전 취임사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디자인이고 우리 모두는 디자이너”라며 “앞으로 디자인을 가지고 서울시를 잘 가꾸어 나가자”며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디자인서울’은 무계획적이고 무질서한 도심개발을 지양하고, 친 문화, 친환경을 표방한 첫 공공디자인 사업이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권영걸 ‘디자인서울’ 총괄본부장(부시장)은 “산업화 과정에서 서울이 도시로서 정체성을 잃어 버렸는데, 단절을 넘어 서울을 역사와 문화에 닿아있는 맥락적인 도시로 만들자는 것”이라며 “외국인 관광객이 즐겨 찾는 도시가 되고, 시민들이 도시를 신뢰하고 긍정과 자부심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디자인서울’은 한강과 남산을 친환경적으로 재개발하는 이른바 ‘한강 르네상스’와 ‘남산 르네상스’에 이어 서울의 거리 곳곳을 새 단장하는 ‘디자인서울거리’, 동대문 일대에 조성하는 ‘동대문디자인파크&플라자’ 등 개별 사업으로 구체화되면서 서울시의 핵심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서울시의 이런 정책기조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서울’은 곳곳에서 이해당사자들과의 마찰에 직면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체육시설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은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한 데 이어 올해 8월에는 서울시청 본관을 허물었다. 두 건물의 보존을 주장했던 문화관련 시민단체들은 ‘친 문화 정책이 맞느냐’고 비판했다.
김상철 진보신당 서울시당 정책국장(문화연대 활동가)은 “문화정책은 위에서 만들어 밑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저변에 확산된 문화적 기류를 끄집어내 활성화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오세훈 시장의 문화정책은 내용물은 똑같은데 포장지만 예쁜 것으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환경단체들은 한강을 친환경적으로 재개발한다는 한강르네상스 사업이 되레 환경과 생태계를 망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 야간 경관 업그레이드 사업이다.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장은 “밤에 곳곳의 빛을 환하게 해 놓으면 자야 할 생물들이 잠을 잘 수가 없고, 야행성 생물들이 활동할 수 없다”며 “생태계에는 큰 재앙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김 국장도 “지금 한강 둔치 웬만한 곳은 다 뜯겨 있고, 자생적으로 자라던 잔디 수목들도 다 없어지고 있다”며 “‘습지공원을 만들겠다’면서 기존에 조성된 생태환경을 모두 무시하고 무조건 새로 깔자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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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 합법화해준다면서 뒤로는 용역 사서 폭력적 단속”
디자인서울 정책과 가장 큰 마찰을 빚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거리의 영세상인들이다. 서울시는 2007년 디자인서울거리 10여 곳을 조성한 데 이어 올해 20여 곳을 추가로 지정했다. 여기에 투입한 예산이 2년간 1333억원에 이른다.
오 시장은 ‘서울을 디자인하라’ 강연회에서 디자인 거리 조성을 위해 노점상과 마찰도 피하지 않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노점이 전부 정리가 된다. 앞으로 서울시에서 노점을 하려면 서울시가 정해준 거리에서, 서울시가 정해준 간격대로, 정해준 디자인으로, 정해준 업종을, 정해준 시간대에만 할 수 있다.”
오 시장의 의지 때문인지, 노점 단속은 현장에서 가혹한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홍대 앞 거리다. 이곳이 디자인 거리로 지정되면서 노점상들은 관할 구청인 마포구청과 심한 마찰을 빚고 있다.
지난달 20일 구청이 고용한 용역직원들은 노점상들의 물건을 압수하고, 커터 칼로 천막을 찢어놓는 등 행패를 부렸다. 노점상들은 “마포구가 디자인거리 조성금으로 서울시가 내려보낸 40억원 가운데 2억원을 용역 철거반을 고용하는데 썼다”고 주장했다.
노점상 이경민(31)씨는 “우리도 시민들과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보기 좋게 보행권도 확보하려고 (마포구청과) 협상도 하고, 디자인 거리 규격화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며 “겉으로는 노점을 합법화해준다고 하면서 뒤로는 용역을 사서 이렇게 단속하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쓰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노점상 1천여명은 지난 1일 마포구청 앞에서 ‘생존권을 보장하고 용역 깡패를 해체하라’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노점상들은 삭발을 하고 철거작업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로 하는 등 디자인거리 사업에 대한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디자인 거리 조성을 둘러싼 이런 마찰은 5년전 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 사업을 추진하면서 용역 직원들을 동원해 노점상을 몰아내고 공사를 시작했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수정 서울시의원은 “‘이명박만 개발했느냐, 오세훈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개발 정책을 많이 쓰고 있다’는 주장들이 많다”며 “그런 점이 많은 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오세훈의 시정을 신개발주의 정책이라고 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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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표’ 치적으로 정치적 상징효과 겨냥 비판도
전문가들은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면서 대규모 개발사업에 대한 반감이 커지자 환경과 문화, 디자인 등의 겉옷을 입은 개발사업이 교묘하게 추진되고 있다고 말한다. 문화와 환경이 개발사업의 슬로건으로 변질했다는 것이다.
김상철 국장은 “(디자인서울이) 애초에는 디자인 전문가들과 공공디자인의 개념으로 한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설계업체에서부터 시공업체까지 대부분 기존의 토건업체들, 토건 사업자들 중심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서울시는 이해당사자의 문제나 ‘디자인서울이 디자인의 외피를 쓴 개발정책’이라는 비판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권 본부장은 “그런 점에 매우 신경을 써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떨 때는 허탈할 때가 있다”며 “(디자인서울 추진과정에서) 불가피한 산고라고 생각한다. 공공디자인을 통해서 도시가 선진화되고 혁신이 되면 그 열매는 시민 모두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청계천 사업을 통해 대선으로 가는 물길을 놓았다. 일부에선 ‘디자인서울이 오세훈 시장의 정치적 야망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차기나 차차기 대선 후보군에 오 시장의 이름도 빠지지 않는다.
박찬국 서울시 도시갤러리사업 예술자문감독은 “청계천 사업에서 이명박씨가 정치적 효과를 상당히 많이 봤다”며 “이런 생각이 상당수 위정자한테 퍼져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임통일 서부이촌동 성원아파트 비상대책위원장도 “오세훈 시장이 디자인서울 사업으로 뭔가 치적을 만들어 보려는 정치적 노림수”라며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임기 2년여를 남겨둔 오 시장이 ‘디자인을 내세워 신 개발시정을 한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사회적 합의과정부터 다시 디자인하는 숨고르기가 필요할 때다.
연출 김도성 피디 kdspd@hani.co.kr, 글 박종찬 기자 pj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