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만리포, 연포, 학암포, 신두리, 꽃지 해수욕장...
어린 시절을 충청남도 서산에서 보냈고 지금도 부모님이 그곳에 사시는 까닭에 나는 태안반도를 따라 자리한 수많은 바닷가들 중 내가 발을 디디지 않은 곳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가까이 있으면 그 고마움을 모른다던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나는 늘 내가 쉽게 가보지 못하는 동해안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서해안은 얕은 수심과 넓은 갯벌 덕에 해수욕을 하기에는 좋지만 그래도 나는 늘 동해안을 동경했다. 흰 백사장과 푸르고 깊은 바다... 나에게 있어 바다는 동해였다.
하지만 무려 이십 년에 가깝게 가지고 있던 나의 편견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바닷가가 나타났으니... 그곳이 바로 오늘 소개하려는 갈음이 바닷가이다.
갈음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3년 9월이었다. 정확히는 9월 8일 월요일 밤 10시 50분경. 당시 나는 TV드라마 <조선여형사 다모>에 푹 빠져 소위 말하는 다모폐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 무덥던 한여름 밤, 우연히 돌린 채널에서 본 <다모>에 그만 폐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9월 8일 월요일. 그 날은 <다모>의 13회 방송이 있는 날이었다. 총 14부로 기획된 드라마였기에 13회는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장면들의 연속이었고,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던 1시간 내내 TV를 집중해서 보느라 나는 이미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TV드라마를 본다는 것이 그토록 정신적으로 체력소모가 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13회는 본방송도 다모폐인의 눈에는 최고였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바로 14회, 즉 최종회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여지껏 본 다른 드라마의 예고편, 그리고 <다모>의 다른 예고편들은 모두 비슷비슷했다. 다음 회의 하이라이트 장면들을 모아 편집한 몇 초짜리 영상물. 가끔은 하나의 장면과 다른 장면의 목소리를 섞어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짧은 시간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다음 회를 광고하는 것이 바로 예고편의 기능일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그 원칙을 충실하게 따랐다. 하지만 <다모>의 최종회 예고는 달랐다. 전혀 달랐다.
본방송이 모두 다 끝나고 나온 몇초 안되는 예고편. 온 몸이 포박당하고 입에 재갈까지 물려진 여주인공이 석양이 지는 바닷가의 갯벌에서 힘겹게 기어가고 있었다. 마구 흔들리는 핸드 카메라로 담긴, 아무런 대사가 없는, 오로지 무엇인가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기어가는 여주인공의 강렬한 눈빛. 온 몸이 묶인채 고통스럽게 기어가는 주인공의 눈높이와 같은, 아주 낮은 앵글에서 그녀의 몸짓을 따라가던 카메라.
오로지 그 장면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주인공이, 화면에는 비치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향해 미친듯이 질질 기어가는 장면이 담긴 그 예고편은 후에 다모폐인들로부터 '질질질'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하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대여섯 장면이 편집된 예고편을 기다리던 나에게 그 예고편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예고편은 끝났다. TV에서는 CF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나는 방금 본 영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는 질퍽한 갯벌 위에서 팔다리가 묶이고 재갈까지 물리운 여주인공의 힘겨운 몸짓과 함께 멀리 펼쳐진, 붉은 석양이 지는 바닷가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조선여형사 다모> 최종회에서 나는 그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주인공이 사력을 다해 기어가던 그 방향, 그 곳에는 그녀가 사랑했고 그녀를 사랑했던 사내가 누워있었다. 그녀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죽어가는 사내. 그에게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기어갔던 것이다.
괴롭게 숨을 헐떡이던 그는 그녀의 재갈을 벗겨주었다. 그리고 울부짖는 그녀에게 힘겹게 말한다.
'울지 마라...너를 마음에 품은 이후로 나는 단 하루도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로 인해 너는 그러지 말거라...난...이제야...깊은 잠을 이루겠어...'
그가 숨을 거두기 전, 그녀는 처음으로 그녀의 마음을 내보였다.
십오 년간 서로를 마음에 품고만 있었던, 사랑에 서툴렀던 두 연인. 그가 세상을 떠나던 그 순간, 그녀의 울부짖음으로, 그녀의 고백으로, 두 연인은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노을이 지는 그 바닷가에서.
'내 심장을 뚫어버린 사랑'이라는 부제답게 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청자들을 다모폐인으로 만들었던 <조선여형사 다모>. 최종회의 바로 그 장면은 절절한 연기와 대사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영상으로도 찬사를 받았다. 그러기에 대체 그 작지만 아름다운 바닷가가 어딘지 검색해보았던 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그곳이 태안의 갈음이라는 바닷가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름대로 '서해 바닷가통'이라 자부해오던 나는 정말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알고보니 내가 갈음이 바닷가를 <다모>에서만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해송 숲과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이병헌과 이은주가 왈츠를 추던 그 바닷가. 그 곳도 바로 갈음이였다. 그리고 또한 갈음이 바닷가는 드라마 <여인천하>의 첫 회가 촬영되기도 한, 실로 바닷가씬의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던 어느 날, 나는 그 곳에 가기로 결심했다. 태안에서 안흥으로 가는 길. 여름에는 피서차량들로 붐비는 그 길은 겨울이었던 탓에 텅 비어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연포 바닷가를 지나니 곧 갈음이 바닷가라는 푯말이 보였다.
작은 마을을 지나자 멀리 무성한 해송숲이 보인다. 아무런 인적이 없는 바닷가. 나는 두근거림을 안고 해송숲을 지나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로 나섰다.
마치 두 사람을 그 차가운 바닷가에 두고 오는 것만 같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겨울 바닷바람은 눈물이 나도록 시렵다.
* 여행 정보 *
옛날 이곳에는 갈대가 무성하여 바람이 불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해조음같이 들린다 하여 "노음(蘆音)"이라 불리워졌는데 이 갈대소리의 한자 음과 훈을 합성하여 그대로 '갈음(갈대노-蘆, 소리음-音)이 되었다고 한다.
갈음이 바닷가를 찾아가려면, 태안에서 안흥방향으로 15km 정도 가면 우측에 갈음이 바닷가를 알리는 커다란 표지판이 있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http://www.galumlee.com/
글_사진 : 류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