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의 고독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전남 강진 만덕산 |
스물 한 살의 나이에 한양에서 저 멀리 남쪽의 땅 끝까지 쫓겨 내려와 서른아홉의 나이까지 무려 18년 세월동안 유배의 고독을 정약용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앞에는 저 멀리 잿빛하늘과 푸른빛의 강진 앞바다가 유배의 슬픔을 더했을 만덕산 자락에 정약용이 다산초당을 지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만덕산 주변에는 산에서 나고 자란 야생의 차(茶)밭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정약용은 유배의 고통과 세상과의 단절에 대한 서러움을 집 주변 산등성이에 자라고 있던 야생차 잎사귀 한 닢을 따 한 잔의 차로 만들어 마셨다. 정약용은 야생차가 흐드러진 만덕산을 ‘차(茶)의 산’이라 하여 ‘茶山’이라 부르며 자신 스스로를 똑같은 이름의 ‘다산(茶山)’이라 칭했던 것은 아닐까? 정약용은 유배의 분노와 고독을 달래주던 한 칸의 초가집을 지어 ‘다산초당(茶山艸堂)’이라 이름 짓고 야생차를 끓일 샘물과 차를 끓일 부뚜막 하나로 18년의 유배생활을 견뎌냈다. 지금도 다산초당 마당 한 가운데는 정약용이 ‘차를 끓여 마셨던 부뚜막’이었던 다조 하나가 유배생활의 단출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
짠하고 애틋한 마음을 500여권 집필하며 달래 |
다산초당 마당 한 켠에는 저 멀리 흑산도 외딴 섬에서 자신처럼 유배의 고독을 달래고 있을 형 정약전을 그리던 정자 천일각(天一閣)이 눈에 들어온다. 짠하고 애틋한 마음이 한량없다.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정약용은 깊은 독서에 빠졌고 그것으로도 양이 차지 않으면 글을 썼던 것 같다. 초라한 초가집 한 칸 다산초당에서 18년을 사는 동안 정약용은 500권이 넘는 책을 집필하는 것으로 지독한 유배의 고독을 달랬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속세와의 부질없는 인연을 끊은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야 했던 깊은 산속에서의 고립과 고독이 유배자 정약용을 미친 듯 다작(多作)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 가을! 남쪽 끝 강진만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해풍과 만덕산 동백나무 길 사이로 빠끔히 자태를 숨기고 있는 정약용의 고독의 흔적을 찾아 떠나자. |
하얀 연꽃의 쓸쓸함을 간직한 백련사 |
다산초당을 뒤로한 채 산길을 휘감아 돌면 동백 숲길 속에 소박하게 둥지를 틀고 있는 하얀 연꽃과도 같은 백련사를 만날 수 있다. 백련사 주변에는 야생차밭과 1,500그루가 넘는 동백나무 군락과 마주친다. 백련사에서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강진만 풍광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곧장 대구면으로 가로질러 달리면 천년 비취빛 고려청자 도요지에서 183기가 넘는 가마터를 볼 수 있고, 청자박물관에서 고려청자의 신비한 기운을 맛볼 수 있다. 강진읍내로 들어와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인 김영랑의 생가에 들러 시인의 글감이 됐던 마당 가운데 샘터와 장독대, 동백과 모란의 흔적을 더듬어 보자. 발길을 병영면 쪽으로 돌리면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전라도 육군총지휘본부였던 병영성을 만난다. 병영성은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표류하다 이곳까지 밀려와 7년 동안 머물다 간 희귀한 인연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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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