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사생대회 이후로 처음 고궁을 찾았다.
여러 차례의 인터넷 접수를 시도한 끝에 창덕궁 특별 관람 접수에 성공했다.
아직도 내게는 창덕궁이란 이름이 익숙하지 않다. 초등학교가 익숙하지 않듯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창경원과 비원으로 기억되는 그곳에 지금은 창덕궁이 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우리의 위대한 문화 유산이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창덕궁 특별관람은 옥류천을 돌아 나오는 코스이다.
돈화문에서 시작 금천교, 인정문과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부용지와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 불로문, 기오헌과 의두각, 애련지와 애련정을 거처 관람정, 존덕정과 폄우사, 옥류천, 연경당과 선항재, 내의원, 낙선재, 어차고, 금호문으로 돌아 온다. 전체 3.1Km의 거리로 약 2시간이 걸리는 먼 길이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시대 왕들의 후원을 거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즐거운 일이다.
나들이는 돈화문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돈화문은 광해군 원년인 1609년에 지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중용(中庸)의 大德敦化에서 가져 온 말이라고 한다. (大德敦化은 ‘큰 덕은 백성 등을 가르치어 강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이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금천교를 건너게 된다. 태조 11년인 1411년에 축조된 금천교는 남으로 해태상, 북으로 거북상을 수호신으로 가지고 있는 궁궐의 구조 상 중요한 구조물이다. 특히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난간석의 아름다움과 견고한 축조기술을 볼 수 있다.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을 지나면 인정문과 인정전이 보인다. 국보 225호인 인정전과 보물 813호인 인정문은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즉위한 곳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의 주요 국사가 행해진 곳이다. 인정전 앞의 품계석, 정면에 있는 용상 등은 왕의 위엄을 보여준다.
다음에 도착한 곳은 보물 814호인 선정전이다. 임금이 평상시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인 선전은 중앙에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임금이 앉고 좌우에 문관과 무관이 앉고 한쪽에는 사관(史官)이 앉았다. 선정전은 궁궐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라도 한다.
어전회의실로 쓰이던 희정당(보물 815호)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되고 1920년에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지었고 정문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다.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이루어진 대조전(보물 816호)은 용마루가 없다. 용이 잠자는 곳에 다른 용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 건물도 1917년 화재로 불타고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 지었다.
대조전을 지나 후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거쳐 조금 긴 길은 걸어 들어 가면 부용지와 부용정이 나온다. 부용지는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이 있다. 1792년에 지어진 부용정은 十자를 기본으로 남쪽으로 양쪽에 한 칸씩 더해 다각을 이루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라고 한다. 건너에 있는 영화당은 숙종 18년인 1692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는 임금이 참석하여 과거를 실시하던 곳이라고 한다.그 옆으로 보이는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지어진 규장각 건물이다. 이 곳에서 일행은 잠시 휴식을 가졌다.
휴식을 마친 일행은 임금의 무변장수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웠다는 불로문을 지나 기오헌과 의두간에 이르렀다. 효명세자가 지은 기오헌과 의두각은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로 유명하다.
숙종 18년인 1692년에 지어진 애련지와 애련정은 연못에 비친 정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곳을 지나 관람정으로 향하는 길부터가 옥류천 특별관람의 절정이다. 부채꼴 모양의 정자인 관람정은 배 띄움을 구경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관람정 옆으로 자리 잡은 존덕정은 육각정자로 겹지붕을 가지고 있다. 폄우사는 효명세자가 독서를 하던 곳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한다. 폄우(貶愚)는 어리것을을 경계하고 고쳐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참을 걸어 옥류천에 도착했다.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개울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큰 바위인 소요암을 깍아 홈을 만들고 물이 그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이곳은 주변에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등이 어우러져 많은 임금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라고 한다. 소요암에는 인조의 玉流川이라는 어필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있다.
飛流三百尺
遙落九天來
看是白虹起
飜成萬壑雷
옥류천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지나친 연경당과 선향재는 보수공사 중이어서 내부를 들여 볼 수는 없었지만 120여칸의 규모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접어든 창덕궁 관람은 아쉽기만 했다.
막바지에 들른 성정각은 애초에는 세자가 유교경전을 고부하던 곳이였으나 1910년대부터 내의원으로 쓰였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낙선재는 처음에는 헌종의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1847년이다. 이후에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가 1966년까지 이곳에서 살았고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가들이 1989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꽃계단과 꽃담, 다양한 창살을 볼 수 있다.
이제 관람의 마지막인 어차고에 이르렀다. 1910년대 이후로 어차고로 사용되었던 이곳에는 지금 순종황제와 황후가 타던 1918년식 캐딜락과 1914년식 다임러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빈청으로 정승들이 편전에 들어가기 전에 기다리면 국사를 논의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두시간에 걸친 긴 나들이를 마치고 인정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관람의 마지막인 금호문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