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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하지 않은 청년 한신과 '모친 묏자리 이야기'

라이프/예병일의 경제노트

by 라제폰 2009. 3. 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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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6일 목요일]
좌절하지 않은 청년 한신과 '모친 묏자리 이야기'
(예병일의 경제노트, 2009.02.26)

한신이 죽은 지 약 70년이 지난 뒤 사마천은 한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그의 고향 회음을 찾았다. 그때 회음 사람들이 말하길 한신이 평범한 백성으로 지낼 때는 그냥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한신이 모친의 묏자리를 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사마천은 무척 감동받았다. 비록 곤궁한 형편이었지만 그가 가진 뜻은 무궁했던 것이다.
생활이 어렵고 세태가 어지러웠으나 그는 기세를 잃지 않고 열심히 무공을 연마하고 병법을 연구했다. 이것이 훗날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된 것이다. (161p)





유방의 중국통일과 한제국 건설의 일등공신 한신. 그는 한나라가 안정되면서 점차 권력에서 밀려났고, 반란에 연루되어 죽습니다. 그가 남긴 말이 '토사구팽'(兎死狗烹)이었지요. 비록 끝은 좋지 않았지만, 청년 한신의 모습에는 우리가 배울점이 많습니다.

한신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가 오리라 믿었고, 항상 무술을 연마하고 병법을 공부했습니다. 자신이 품은 큰 뜻을 잊지 않고 지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조차 치를 수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애써 넓고 높은 곳에 어머니를 모셨다고 합니다. 사마천이 훗날 한신의 고향을 방문해 감동을 받은 '모친의 묏자리 이야기'입니다.

그는 귀족 자제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사타구니 무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가슴에는 항상 이렇게 큰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청년 한신은 주위의 냉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은 겁니다.

훗날 초왕이 되어 고향을 찾은 한신은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게 했던 사람을 찾아 그를 초나라의 중위(성을 순찰하고 도둑을 잡는 무관)에 임명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내가 인내하여 오늘날 성공할 수 있었다."

한신은 인내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인내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았습니다.

"한신이 밥을 빌어먹고 모욕을 받을 때 반복하여 사색하고 탐구한 지 오래되어 100만의 병사로도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으니 이는 모두 평소 공부에서 바탕을 둔 것이지 급히 이룬 일이 아니다."
청대의 학자 왕명성이 '십칠사상각'에서 한 말입니다.

아쉽게도 한신이 쓴 병서는 전해지지 않았고, 반고가 '한서'에 그의 병서를 소개한 '한신'도 남아 있지 않지만, 한신은 뛰어난 현장의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병법가였던 겁니다.

청년 한신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을 갈고 닦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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